
기억의 저 편
뒷동산에 진달래가 붉게 물들어 가는 따스한 봄날이 돌아오면 나는 내 기억의 저편에는 무
엇이 자리 잡고 있는지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고 있는 궁금증을 찾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저편의 기억들이 내게로 살며시 내릴 때쯤이면 별들도 낮게, 아주 낮게 내게로 내려와 속삭
여 준다.
초롱초롱한 별빛은 내 눈가에 아롱지며 들릴 듯 들릴 듯이 지난날의 추억을 속삭여 주었다.
영롱한 별빛이 내 기억의 저편에 머물고 있는 추억들을 한 줌 가득 내려놓으면 그 속삭임에
잠들지 못하던 숫한 밤들.. 차마 잠들 수 없었던 가슴시린 밤, 그런 밤 기억의 저편에 있는
추억들이 하늘 가득 반짝인다.
시골에서 낳고 자라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푸른 보리밭 이랑을
뛰놀며 버들피리를 불어 대며 보리밭고랑에 숨겨 놓은 추억도, 책상에 금을 그어놓고 땅 따
먹기를 한다며 치고 박고 싸우던 개구쟁이 시절의 추억도,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는
잊혀진 내 짝꿍 00이의 모습도, 엄마에게 악을 발악 쓰며 대들다 아버지에게 지게작대기로
오지게 얻어맞고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은 아닌지 서럽게 울던 그때 그 쓰라린 기억
도, 아버지가 바쁜 농사일로 장사를 쉬는 날이면 내 키보다 더 큰 짐받이 자전거를 타고 십
여리 신작로 길을 달리다 논배미에 처박혀 하얀 교복을 흙강아지로 만들어 집으로 돌아오던
추억도,
여자 친구를 사귄다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연애편지를 쓰고 또 쓰다가 단 두줄도 쓰
지 못하고 휴지통에 구겨버린 첫사랑의 사연도, 냇가에 나가 송사리 떼를 몰아 쫓던 실개천
의 검정고무신 아이들, 어느 가을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과수원집에 몰래
숨어들어 사과를 따먹다 들켜 책보를 치켜들고 벌을 서야했던 오후의 아픔, 여름날 소를 몰
고 들로 나가 냇가에서 물장구치고 실 컨 놀다가 소에게 빵빵하게 물배를 채워 집으로 돌아
오던 추억도. 상급학교 (중학)에 진학한다며 땅거미가 훨씬 지나서도 책과 시름하다 서둘러
고개를 넘다 허깨비에 놀란 추억도, 저수지 둑에 나가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먼 훗날을 기
약하던 뒷집의 은혜와 아기자기했던 낯 간지러운 밤의 수줍음,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주인
아저씨 몰래 과자를 훔쳐 먹다 들켜 줄행랑을 치며 가슴 졸이던 조마조마한 추억 들...
감나무 집 영숙이를 괴롭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붙잡혀 걔네 집 수돗가에서 구정물통을
들고 벌을 서야 했던 무지 쪽팔린 추억도. 영숙이 뇬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하며 나를 놀린다.
소풍날 어여 까먹으라며 엄마가 주머니에 넣어준 100원짜리 동전을 잃어버리고 소풍 내내
아이스깨끼 하나 사먹지 못하고 입만 쩍쩍 다셔야 했던 그 쓸쓸한 기억도. 집에 모내기를 하
던날 아버지 몰래 막걸리를 대구 퍼 마시다 술에 취해 논배미에 처박혀 몸부림 치던 웃지 못
할 추억도. 겨울날 논에서 얼음을 지치다 얼음판에 빠져 모닥불을 피워놓고 양말을 말리다
양말을 홀라당 태워, 먹고 엄마한테 부지깽이로 오지게 얻어맞고 쫓고 쫓기던 그 씁쓸한 추
억도…
한번쯤 나를 스쳐지나간 인연들이 그리워진다. 아픔이 생각이 난다.
아주 가끔은 기억의 저편에 묻혀있는 사람들이 생각이 나고 뜬 금 없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
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저편의 기억들이 내게 찾아 왔다가 쉽사리 잊혀 지기도 하고, 또 다른 인연들이 내 머릿속에
맴돌며 어지럽게 헤매기도 하다가 금방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몇 날 며칠을 남아 있기도
한다.
오늘도 바짝 다가 선 가을을 두고 떠오르는 기억들이 이유도 없이 그리워진다.
그때 그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아 갈까.
혹 죽은 친구도 있지나 않은지...
그 때의 일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또 보고 싶기도 하다.
올 가을에는 나를 스쳐간 인연들을 한번쯤 만나고 싶다.
어린 시절 나를 키워준 아픔과 웃음과 행복들, 지금은 모두 어른이 되어있을 사진 속에 묻힌
친구들이 보고 싶다.
내 곁을 떠나버린 인연들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기에 더 생각이 난다.
이제는 나를 벌주던 영숙이 아버지도 고인이 되었고 과수원집 큰 아들도 논 밭떼기를 팔고
고향을 떴다.
고향에 가 봐야 냇가에 나가 물장구치며 송사리를 잡던 친구도 없고 한여름 밤에 마당에 멍석
을 깔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윤동주의 서 시를 읊조리던 친구도 없다.
자리를 깔고 누워 옛날이야기를 들을 여유도 없고, 모기떼를 쫓는다며 소꼴로 모깃불을 놓던
낭만도 없다. 그리고 소를 몰고 들로 함께 나갈 친구도 없고 고향도 없다.
구불구불 흙먼지가 펄펄 날리던 정겨운 신작로 대신 이젠 반듯하게 뻗은 아스팔트 신작로로
변하여 길이 더욱 삭막하게 느껴진다.
신작로 길을 쌩쌩 내달리며 페달을 힘차게 밟던 자전거 대신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가 바쁜
일상을 더욱 재촉한다.
지금 쯤 고향에 가면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가녀린 몸매로 한들거리며 나를 반겨줄 텐데 이
젠 코스모스 꽃길도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기 힘들어 졌다.
모두가 떠나가 버린 삭막한 자리엔 젊음도 없고 낭만도 없고 풋풋한 인정도 없다.
형체도 색깔도 없는 삭막함만이 존재 한다.
알 수 없는 궁금증과 그리움들이 어찌 보면 더 보고 싶은 추억인지도 모를 일이다.
기억의 저편에는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고 쓰라림도 있다.
잘못도 있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기억도 있고, 잊고 싶은 기억들도 있고 영원히 지워버
리고 싶은 불행한 과거도 있다.
그러나 다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것들이 내 가슴 언저리에 행복한 추억이 되고 웃음이 되어있
는 것을 어찌하랴.
내 어린 시절은 가슴은 훈훈하고 따뜻했다. 또한 눈물도 웃음도 가난도 풍부했다.
그러나 추억거리도 웃음거리도 아픔도 지나고 보니 모두 다 그리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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